나의 이야기

부활의 아침에 넘어서야 할 것? / 미목 이효상 작가칼럼

이테리우스 2021. 4. 2. 11:46

부활의 아침에 넘어서야 할 것?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이 오고 고난의 시간이 지나 부활의 아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친히 오셔서 우리 인생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은혜중의 은혜다. 부활사건은 하늘 길을 열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죄로 인한 사망의 자리에서 살 희망으로 막힌 담을 허물어 소통케 하는 새로운 길이었다.

사실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나 돌무더기가 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다. 인간을 사망의 길로 몰아내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지이자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 장벽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면 우상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날카로운 현안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만든 물체나 이교도들의 신들을 섬기곤 했다. 성경에 주로 나오는 우상은 바알과 아세라, 아스다롯 등이다. 아세라는 바알의 어미이다. 바알은 천둥과 번개의 우상이다. 아스다롯은 농사의 우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우상이 황금 송아지 우상이다.

한편 초대 교회 안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의 옛 관습이나 문화가 우상의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신약시대에는 우상숭배 개념이 더욱 넓어졌다. 재물, 탐욕, 음행 등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모두를 우상과 동일하게 간주했다. 그런 우상은 세계 도처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과 교회를 움직이는 힘에는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첫째가 교회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맘몬’의 힘이다. 이른바 ‘물질(돈)’이다. 오죽하면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생겼을까. 이것은 교회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성도들의 마음속만이 아니라 목회자의 마음속에서도 이미 자리하고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 하신 후 첫 행하신 일은 성전에서 돈 매매하거나 돈 바꾸는 장사치들의 좌판을 둘러엎으신 것이다. 그렇게 성전을 청소하시고 몸과 영혼이 병들고 상한 자들을 고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로 교회의 장래를 밝게 볼 수만은 없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부귀와 명예를 취하는 일들이 난무하다. 교회나 교계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맘에서 시작한 일이 어느 날 장사가 되고 영업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행여나 혹시나 어쩌다 금송아지를 주님보다 더 사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종교든 비우는 성빈(聖貧)생활이 없는 종교는 타락하게 되어 있다. 출력이 없이 입력만 하면 반드시 탈나게 되어 있다. 이런 금송아지 우상을 넘어서야 산다.

코로나 보다 더 무서운 탐욕이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다. 코로나에도 매년 재산이 몇 억씩 불어나는 공무원들은 투자의 귀재들인가. 최근에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LH 부동산투기는 인간의 탐욕은 과연 끝이 없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여의도에 봄향기를 가득 머금은 벚꽃이 만발하였지만 ‘가자농부’는 왜 그리 많은가. 여야 할 것 없이 다 썩은 것인가. 공직자와 법관이,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가 부패하면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있나.

인간이 추구하는 욕심은 돈, 권력, 명예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를 치열하게 만드는 원초적 욕망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에서 이룬 성과에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하나나 둘을 가지려는 순간이 탐욕이다. 그만큼 삶의 존재 자체가 불안정해지고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삶의 역설이다. 지금도 주변엔 돈 많은 재벌이 권력이나 명예를 더 갖고 싶고, 권력을 가진 공직자가 그 권력을 이용해서 돈이나 명예도 갖고 싶고, 사회적인 명예를 충분히 가진 사람이 돈과 권력을 더 가지려 하다가 소중히 일궈온 삶이 탐욕으로 한순간에 추락하는 모습을 무수히 보게 된다. ‘무소유’를 강연하던 어느 종교인이 페라리자동차와 건물주로 ‘풀소유’로 추락하였으니 말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병폐는 끝없는 욕심이 아닐까.

코로나가 소멸되어야 한다. 길가의 개나리와 벚꽃은 만발하였지만 코로나로 일상의 회복을 맛보지 못한다. 모두들 참으로 어렵다. 사회와 교회의 양극화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혹자는 우스개로 말하기를 종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마 곗돈(?)전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한다. 부활의 아침을 만나니 달라진다. 우리가 너무나 좋아했던 세속적인 것들, 우상들을 제거하는 변화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라는 말이 요즘 여기저기서 들린다. 천상병 시인은 그의 시집 ‘귀천’에서 이 땅에서의 삶을 ‘소풍’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한 대로 소중한 삶과 물질들을 드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인가.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치고 다스리고 버려야할 그 모든 것을 거듭나고 깨끗케 하시는 은혜를 사모하고 있는가.

사월의 봄, 부활의 봄에 코로나로 위기를 맞은 이 시대 백성들에게 교회는 물질이 아닌 영적인 복음으로 교회됨을 보여줘야 한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주님과 함께 하는 교회로 가기 위해선 금송아지 우상을 넘어서 다시 복음으로 가야 산다. 고난가운데 탄식하고 신음하는 사회과 교회와 이 백성들에게 ‘평안하라’하시는 주님의 위로와 음성이 다시 들려지기를 기대하며, 아직도 세상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와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며 달려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부활의 아침에 유안진 시인이 쓴 ‘내 믿음의 부활절’이란 시를 다시 읽는다. “지난겨울/ 얼어붙은 그루터기에도/ 새싹이 돋습니다./ 말라 죽은 가지 끝/ 굳은 티눈에서도/ 분홍 꽃잎 눈부시게 피어납니다./ 저 하찮은 풀포기도/ 거듭 살려내시는 하나님/ 죽음도 물리쳐 부활의 증거 되신 예수님/ 깊이 잠든 나의 마음/ 말라죽은 나의 신앙도/ 살아나고 싶습니다./ 당신이 살아나신/ 기적의 동굴 앞에/ 이슬 젖은 풀포기로/ 부활하고 싶습니다./ 그윽한 믿음의 향기/ 풍겨내고 싶습니다. / 해마다 기적의 증거가 되고 싶습니다.”

이런 부활에 참여하므로 개인이 살아나고 민족이 살아나는 역사를 꿈꾼다. 나사로처럼 사망의 자리를 털고 나온 부활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미목이효상 작가와 함께 한 이어령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