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미목 이효상 작가칼럼 / 절망의 자리에서 하늘을 본다.

이테리우스 2020. 12. 16. 16:45

                                      절망의 자리에서 하늘을 본다.

 

‘희망’은 있는가? 다들 ‘희망’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굳게 굳게 다짐하건만 지나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간들 다시 회복이 될 것인가?

그 뿐이랴. 나라의 두 축인 안보와 경제가 무너져 내려도 “괜찮아, 다 잘 될꺼야”라는 희망의 찬가가 울려 퍼지고 있으니 말이다. 경제에도 가짜 희망이 판을 친다. 코로나 사태 와중에 나랏빚이 올해 100조원 이상을 넘는다지만, 직업없는 백수들이 100만명을 넘어섰다지만 다들 천하태평이다. 정치권은 ‘추경’이라는 퍼주기 경주에 나섰고 국민은 달콤한 돈 맛이 좋아졌다. 포퓰리즘 (Populism)으로 망한 나라들이 즐비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굳게 믿는다. “설마, 우리나라가 망하겠어?”라는 막연한 희망이 국민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왜 사람들은 뻔한 사실을 간과할까.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 에바 메나세는 “사람들이 풍요로움에 빠져 주어진 호사의 의미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현대의 뇌과학은 그 이유를 이렇게 풀어놓는다. 인간의 뇌는 저장 용량이 제한적이므로 과거의 묵은 기억을 지우거나 외진 곳으로 옮기고, 그 공간을 새로운 기억으로 채운다. 수십 년 전 전쟁이나 가난의 기억보다 현재의 평화와 풍요 문제가 더 부각될 수밖에 없다. 양적으로도 후자에 관한 정보는 넘쳐난다. 인간이 균형감을 잃고 현재의 상황에 쉽게 매몰되는 이유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교회도 막연한 희망을 노래할 것인가. 만약 오늘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어디로 임하실까. 성탄절이 다가온다. 처음 예수님이 오신 곳은 가장 낮은 절망의 자리 누울 곳이 없는 ‘마굿간’이었다. 특급호텔의 상석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고 길 바닥인생인 서울역의 노숙자로, 거리의 나사로로, 죄수의 옷을 입고 아니면 병자의 몸으로 오실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는 별 관심들이 없다. 온갖 화려한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다보니 이제는 날마다 좀 더 저 높은 곳만 향해 가려한다. 고통받는 밑바닥 인생들, 민초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이미 오래된 것일까. 이렇듯 ‘교회가 희망’이라는 불씨가 꺼져가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세상은 강하게 비판의 소리를 내고 있다.

가장 낮고 처절한 절망의 자리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삶의 열정이자 현장이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진실하게 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가장 낮은 자리, 밑바닥을 치고 나면 다시 솟아날 힘과 용기가 생긴다. 그러니 꼭 진실하게 절망하고 낮아지라 권하고 싶다. 다시 교회는 야성과 영성을 회복하고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가 사랑을 실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강도만난 사람들로 채워져야 한다. 강도만나 경제적으로, 육신적으로 소외당하는 이들의 억울한 자리로 다가가 아픔에 관심을 가져주고 함께 나누며 붙들어 주므로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그래서 그들에게 참된 기쁨과 회복을 되돌려주는 기회가 되면 안 되는 것일까.

‘천하대혼돈’이라는 저서로 코로나 시대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글에 “변화는 절망에 지쳐 더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타난다.”는 말로 희망보다 절망의 가치를 제시했다. 그는 “진정한 용기는 터널 끝에 보이는 빛이 어쩌면 반대 방향에서 달려오는 기차의 헤드라이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희미한 불빛을 찾는 식의 ‘거짓 희망’을 단호히 뿌리치라는 것이다. 아직 희망이 있다는 안일함이 정확한 현실 인식을 방해하고 변화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지금 벼랑 끝에 있다는 끔찍한 절망을 받아들일 때 돌아설 용기가 생긴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지젝의 진단은 거짓 희망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 더없는 고언이다.

한국교회! 이대로는 안된다. 강도만나 모든 것을 다 털리면서도 하나되지 못하는 지도자들의 무능한 민낯을 보고 있다. 더 이상 주변 눈치 볼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하나됨을 위해 어떻게 몸을 던질 것인가를 고민하고 몸소 실천해야 한다. 진정한 변화와 변신을 가로막는 주범은 누구인가. 자칭 지도자라는 이들이 “이대로,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생각과 자신들이 가진 철 밥통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기에, ‘저들 탓’이라고 여전히 고함만 치는 것 아닐까.

내 탓으로 알고 가슴을 쳐야 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나 사회, 혹은 교회를 바닥에서 끌어 올려줄 구세주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범사에 때와 기한이 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분이 오시려면 말세의 여건이 갖춰져야 한다. 윤리와 도덕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부조리가 춤추고, 국민은 수백 번 더 찢어져야 한다. 교회는 더 낮아져야 한다. 마침내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절규와 아우성이 터질 것이다. 공동체 내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존의 건강한 연대의식이 움트는 것은 바로 그 시점이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어설픈 ‘희망’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새로운 인물을 키우지 못한 잘못, 교회의 사유화에 침묵한 잘못, 자신이익 챙기느라 한국교회 전체 이익을 돌보지 않은 잘못, 하나되어 제대로 싸우지도 대응하지도 대안 제시도 못한 잘못, 품격 없는 행동으로 신뢰도를 떨어뜨린 잘못, 반성하지 않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잘못, 다음세대에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잘못 등 말이다.

감히 ‘희망’을 얘기하지 말라. “설마 괜찮겠지”하는 어설픈 희망으로 때우려 하지 마라. 우리는 그간 신앙의 선배들이 피땀으로 일군 희망을 함부로 낭비했다. 그 희망은 이제 바닥이 났다. 현재의 가짜 희망으로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진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요나가 배에서 떨어져 가장 밑바닥인 고기 뱃속에 들어가자 ‘더 이상은 안되겠구나, 나는 죽었다’라고, 불난 집에서 뛰쳐나와 몸둥아리 하나 남았을 때처럼 절망하고 절망해야한다. 세상에 절망하고 사람에 절망하란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Pandemic)’이란 악몽에서 깨어나는 법이 있다면, 절망하고 절망하다 아무리 둘러봐도 바닥이어서 또 절망일 때 그 때 홀로 선 절망 하나가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다. “이러다간 죽겠구나!” “정말 망하는구나!” 이런 절망적 두려움이 몰려올 때, 사람은 극한 상황에서 새로운 신앙의 눈을 뜨게 된다. 진정한 변화와 변신은 거기서 시작된다.

어떤 일이든 극에 달해야 반전이 생긴다. 아래로 떨어지는 공도 바닥까지 완전히 닿아야 다시 튀어오를 수 있다. 코로나 확진자가 멈추지 않고 계속 터져 나오므로 신뢰를 잃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세상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단이나 사이비와 같다는 세상이 보는 이미지를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교회도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막연한 희망을 논하며 위기를 탈출하지 못했다. 비대면 또는 20명 미만이라는 기준에 발목이 잡혔다. 스스로 자초한 면이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건강한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성도들의 헌금이 재정의 20%선에 멈춰서 있고, 중대형 교회들이 소유한 건물과 땅을 내놓고 있다. 교회 건물 임대 및 매매 사이트에는 내 놓은 물건으로 차고 넘친다. 결국 교회는 코로나에 갇히고 말았다.

2020년 성탄절을 앞두고 아직도 더 낮아지고 더 정신 차려야 할 것 같다는 지적들은 먼 나라 이야기인가. ‘복음으로’ ‘복음만이’에 공감하면서 이제 가장 낮은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하늘을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