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목 이효상 작가 |
김수영 시인은
김수영 시인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1949년 김경린(金璟麟)·박인환(朴寅煥)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서 주목을 끌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자유와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쓴다.
3인 합동 시집이후 1959년이 되어서야 첫 시집을 발간하지만, 1968년 불의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다시 시집을 발간하지 않았다. 그리고 1974년에 시선집 형식으로 『거대한 뿌리』를 냈으니까 그는 생전에 딱 한 권의 시집을 낸 것이 된다.
김수영은 생전보다 사후에 더 인기를 누렸다. 김수영이 살아서 낸 시집은 1959년 ‘달나라의 장난’이 유일했다. 하지만 1970년대 초 민음사가 ‘오늘의 시인’ 총서를 시작하며 첫 시선집으로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출간했고, 이 시집이 3만부나 팔렸다. 70년대는 그야말로 김수영의 시대였다.
서울 동대문 밖에 있는 동묘는 김수영이 소년 시절 어른들을 따라 명절 때마다 참배하던 곳이다. 김수영은 이 동묘의 이미지를 살려 ‘묘정의 노래’라는 시를 썼는데, 이 시가 1946년 ‘예술부락’에 실리면서 등단한다. 공교로운 것은 김수영은 모더니스트로서 평생 전통주의라고 이름 붙일 만한 시를 쓴 적이 없는데, 이 시가 유일한 예외였다는 점이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종로6가 집, 부인 김현경 여사를 처음 만난 진명여고, 효제초등학교(구 어의동 보통학교)·선린상업학교·연희전문학교 등 그가 다닌 학교들, 청년 시절 연극을 하던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친구인 박인환 시인이 운영한 명동 서점 ‘마리서사’, 성북구 돈암동 신혼집, 의용군으로 6·25전쟁에 끌려갔다가 포로 생활을 한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현대문학사 신구문화사 창작과비평사 등 그가 드나들던 출판사들….
‘김수영의 장소들’은 서울이 중심이지만 부산 화성 경주 강릉 군산 그리고 북한 만주 일본에도 있다. 그 장소들을 거쳐 가며, 또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군사독재 시절을 통과하며 김수영의 문학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주목하게 된다.
김수영 시인이 다녔던 효제 초등학교
김수영의 시인으로서 삶은 해방 후 등단해서 1968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20년이 조금 넘는다. 그 사이 6·25전쟁이 있었고 포로 생활도 했으므로 실제 그가 문학에 정진한 시간은 10여년에 불과하다. 특히 늦은 밤길을 건너다 좌석버스에 치여 세상을 떠나기 전 몇 년이 김수영 문학의 절정기였다.
좌에도 우에도 기울지 않았던 김수영은 1960년 4·19혁명을 거치며 현실참여 시인으로 거듭난다. 그는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라고 말했고 “무식한 위정자들은 문화도 수력발전소의 댐처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최고의 문화 정책은, 내버려 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라고 외쳤다. 지금 읽어도 김수영의 글은 낡아 보이지 않는다.
68년 벽두를 장식한, 김수영과 이어령의 ‘문학의 사회참여’ 논쟁 직후인 3월 김수영과 가족들은 서빙고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하지만 김수영은 4월 부산 국제신보와 펜클럽에서 주관하는 문학 세미나에 참석해 그 유명한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시의 존재’를 발표한다. 여기서 김수영은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우리나라에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고 있을 문장을 토해낸다. 김수영이 ‘시여, 침을 뱉어라’를 발표한 미화당백화점은 현재 부산 지하철 1호선 남포역 1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광복로 패션거리의 삼거리 모퉁이에 있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박인환 추모 글에서 김수영은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김수영은 부인이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거나 부자 의사인 누이 남편의 재력에 주눅이 들었다는 얘기를 글로 썼다. 육체적 욕망, 부끄러움, 열등감 같은 것들을 감추지 않았다. 저자는 “김수영은 마음에 없는 글쓰기를 못 했다”며 “100퍼센트 진실한 글”이 김수영의 마력이라고 했다.
김수영문학관 운영위원장인 홍기원씨가 쓴 ‘길 위의 김수영’에선 시 ‘죄와 벌’에 대한 비난도 언급한다. 거리에서 우산으로 부인을 폭행한 내용을 담은 이 시는 반여성적이란 질타를 받고 있다. 저자는 포로수용소를 극적으로 벗어나 부인·아들과 재회를 간절히 바랐는데, 부인이 아들을 친정에 맡긴 채 자신의 선배와 동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당시 김수영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수영이 사용한 ‘억만 개의 모욕’이란 시어를 인용해 “이 ‘억만 개의 모욕’ 화살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야 했던 김수영의 심적 기저를 이해해야만 시 ‘죄와 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김수영 후배이자 한국문학관 염무웅 관장은 “그가 문단을 넘어 지식인 사회 전체의 주목을 받은 건 조선일보에서 이어령씨하고 논쟁을 해서인데, 그때가 김수영 정신의 절정기였다”며 “그 무렵 부산에서 강연한 ‘시여, 침을 뱉어라’는 우리나라 문학사상 가장 탁월한 문건”이라고 평가했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건널목을 건너면 나타나는 ‘버거킹 종로점’ 앞에는 ‘김수영 생가 터’ 표지석이 박혀 있다.
첫 시집 제목은 『달나라의 장난』인데 표제작인 「달나라의 장난」은 1953년에 퇴고한 것으로 전집에 나와 있다. B6판. 118면. 1956년 춘조사에서 ‘오늘의 시인 총서’로 발간하였다. 차례 다음에 “이 시집을 박준경형에게 드린다.”라는 헌사가 붙어 있다. 헌사 뒤에 발표연도 순으로 40편의 시가 실려 있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하였다.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달나라의 장난’은 첫 시집에서 인용
미목 이효상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