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계절이 고개를 숙이고 바람 끝에 서늘한 온기가 스밀 때면 문득 지나온 날들이 떠오른다.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뜨거운 열정으로 밤을 지새우며 글을 적어 내려가던 옛 시절의 기억도 어느덧 희미해진 풍경처럼 아득해지곤 했다. 바쁜 일상이라는 소음 속에서 흩어지는 마음 조각들을 놓치지 않으려 휴대폰 메모장에 부지런히 낱말들을 모아두었다. 틈틈이 남겨둔 그 조그만 흔적들은 나를 길 잃지 않게 해주는 작은 나침반이자, 마침내 새로운 문장을 쓰게 만든 시작점이 되었다.
새삼 문장이라는 깊은 우물을 들여다본다. 인류가 비단이나 돌, 혹은 종이 위에 마음을 새기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역사’란 빛나는 이름을 얻었다. 고대인들은 자신이 살았던 날들의 기쁨과 슬픔, 거대한 전쟁과 삶의 기록을 글이라는 형태에 담아내려 애썼다. 그 투박하고도 정성스러운 손끝에서 태어난 문자와 재료들은 시대를 지나 단단한 체계를 갖추었고, 다채로운 역사의 물줄기가 되어 세상 곳곳으로 흘러들었다.
자연 속의 새들도 노래하고 동물들도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며 한 편의 풍경을 이루지만, 시를 쓰고 소설을 짓고 책을 남기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특권이다. 타인이 남긴 글이나 책을 가만히 읽다 보면 그 사람이 지나온 계절과 그가 지닌 성품, 삶을 바라보는 진솔한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시 한 구절에 깊은 생각의 닻을 내리고, 소설 한 권에 끝없는 상상의 바다로 빠져드는 까닭도 문학이 우리의 감정을 흔드는 마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올해 나는 드디어 오랫동안 망설여왔던 ‘소설’이라는 깊고 넓은 바다에 첫 발을 내딛고 긴 긴 밤을 지새웠다. 메모장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던 파편 같은 글들을 모아 이어 붙이니, 비로소 서사와 온기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글을 짓는 시간은 단순히 문장을 나열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자신과 타인의 마음 깊은 곳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주었고, 혼자 고군분투하던 생각을 정돈하여 누군가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공감의 첫걸음이 되어주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란 노래의 가사처럼, 가을은 누구나 마음속에 묻어둔 일기같은 편지같은 글들을 쓰며 시인이 되고 작가가 되기에 더없이 근사한 계절이다. 각본 없는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내 안의 갈등과 고뇌를 글이라는 그릇에 담아 재구성할 때 삶은 더욱 깊고 드라마틱하게 다가온다.
인생에도, 글에도 정해진 정답은 없다. 완벽함을 다투기보다 그저 끊임없이 나만의 글 길을 물으며 차분히 일궈나갈 뿐이다. 나는 문학과 글의 단단한 힘을 믿는다. 정약용 선생의 곧은 정신을 이어받아 나만의 작품 세계를 묵묵히 일궈가려 한다. 이 선선한 가을 날, 머릿속에 가만히 맴도는 생각이나 숨겨둔 마음이 있다면 일기처럼 편지처럼 작게나마 글을 적어보기를 권해본다. 지금까지 나의 글을 읽어주고 마음을 나누며 따뜻한 응원을 보내주는 이들에게도 가슴 깊은 감사를 전하며, 가을 날 띄우는 편지가 당신에게 따스한 문장 하나로 살포시 스며들기를 소망 한다.
- 글쓴이 미목 이효상 작가 / 다산문화예술진흥원 원장